권연경 연구위원이 Seize Life 3권(2009년 8월): 45-51 에 기고한 글입니다. 이 글은 기독연구원 느헤미야가 설립되기 얼마 전에 발표된 글입니다. 이 글에는 기독연구원 느헤미야가 설립되게 된 문제의식이 담겨 있습니다. 또한 느헤미야의 앞으로의 방향을 가늠해 볼 수 있는 글입니다.
“비일상적인” 우리의 신학교육
현재 신학교에서 일상생활신학이 어떻게 가르쳐지고 있는가를 말하는 것이 본래 이 글의 취지겠지만, 안타깝게도 그 점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지 않다. 여전히 주일과 평일이라는 시간의 구분, 교회와 세상이라는 공간적 구분, 그리고 목회자와 평신도라는 신분의 구분에 길들여진 우리들로서는 일생생활신학이라는 말 자체가 생소하다. 일견 역설적이지만, 신학교라는 특정한 삶의 자리는 이러한 이원론적 경향이 가장 깊이 스며든 곳이다. 그런 곳에서 일상생활신학의 모양새를 찾는다는 것은 나무 위에 올라가서 숭늉을 찾는 것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일상생활신학이 일상적 삶을 위한 신학을 의미한다면, 한 마디로 현재 대부분의 신학교 교육은 오히려 그 대척점에 서 있다. 성도들의 일상적 삶과 신앙을 염두에 둔 과목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경우 신학교육의 커리큘럼은 성도들의 일상생활보다는 목회자들의 목회활동을 돕는 과목들로 이루어져 있다. 교회를 돕기 위한 곳이 신학교겠지만, 현재의 구조를 놓고 볼 때 신학교육의 틀 속에서 교회의 대부분을 이루는 성도들(“평신도”)과 그들의 삶의 공간인 일상생활은 철저히 배제되어 있다. 신학교육은 철저히 “목회자”를 위한 것이며, 또 목회자는 철저히 “교회일”을 하는 사람으로 규정된다.
어떻게 보면 이는 불가피하다. 현실적으로 한국 신학교들의 교육 목표는 “목회자 양성”에 맞추어져 있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목회”란 많은 경우 목회자가 교회를 중심으로 수행하는 활동들로 모아진다. 이상적으로 보자면 이 목회가 성도들의 일상적 삶을 돕는 것이어야 하겠지만, 우리 교회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대부분의 경우 목회는 “주일”이라는 특정한 시간과 “예배당”이라는 특정한 공간을 중심으로 한 개념이다. 물론 주중에도, 그리고 예배당 밖에서도 많은 활동들이 이루어지지만, 대체로 “교회일”이라고 부르는 범주를 넘어서지 않는다.
목회자 양성의 구조 또한 이러한 경향을 더욱 부추긴다. 몇몇 예외를 제외하면, 신학생들이 졸업 후 바로 독립된 목회를 시작하지는 않는다. 신학생 시절부터 전도사로, 그리고 졸업 후에도 한 동안 “부교역자”로서 “담임목회자”의 요구에 맞추어 사역해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신학교육의 현장은 언제나 “쓸 만한” 신학생 혹은 졸업생을 기대하는 일선 목회자들의 요구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여기서 “쓸 만하다”는 것은 성도들을 잘 도울 수 있는 자질이 있다는 의미보다는 담임 목회자가 원하는 역할을 잘 수행할 수 있다는 의미가 더 강하다.
현실적으로 한국교회의 신학교육이 현재와 같은 목회자 중심 구조를 벗어날 가능성은 없다. 다양한 이유로 신학교육의 실효성에 의문을 품고 교육과정의 개정을 추진하는 경우도 있지만, 여러 가지 현실적 여건의 한계와 신학교육에 간여하는 계층들 간의 이견으로 인해 좌절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최근 몇몇 대표적인 신학교들의 협의체 및 신학계에서도 신학 교육과정 개편과 관련된 논의들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졌지만, 논의와 제안의 수준에 그칠 뿐 그 실질적 결과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의 노력은 우선 방향을 재는 일에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주어진 상황을 일상생활신학의 입장에서 평가하고, 가능한 해결 혹은 개선의 방향을 생각하면서, 어떻게 하면 실질적인 성과를 이룰 수 있을 것인지 고민해 보는 것이다.
어떤 구조가 스스로를 개혁하는 경우가 많지 않다면, 그래서 개혁의 실질적 동기나 에너지가 외부로부터 와야 하는 것이라면, 일상생활신학의 측면에서 신학교육을 개혁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일 수 있다. “목회자”와 “교회일”에 몰두하는 신학교육의 자아편집증을 개선할 추진력은 오히려 일상생활신학을 필요로 하는 성도들에게서 나와야 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먼 길 같지만, 건강한 일상생활을 살기 위한 성도들의 정당한 요구가 목회자들의 “목회” 개념에 반영되고, 그런 목회를 준비하는 과정이 신학교육에 반영되도록 하는 것이 오히려 현실적인 길일 지도 모른다. 다소 거칠게 말하자면, 일생생활신학과 기존 신학교육과의 관계는 신나는 의기투합보다는 긴장과 갈등의 양상을 취할 공산이 크다. 혹은 보다 부드럽게, 일상생활신학이 기존의 신학교육 방식에 질문을 제기하고, 그 물음에 대한 진지한 답변을 요구하는 방식일 수도 있을 것이다.
교회와 목회에 대한 물음
신학교육이 목회의 범주를 벗어나기는 어렵다. 우리는 목회자들의 목회 개념이 너무 좁다고 느낀다. 물론 목회 개념은 그 배후에 교회에 관한 관점을 감추고 있다. 그러니까 목회 개념이 너무 좁고 이원론적이라는 말은 보다 근원적으로 교회관 자체가 성경적이지 못하다는 말이 된다. 현재 한국교회에서 대세를 이루고 있는 목회 패턴이 성경의 가르침에서 크게 벗어났다는 비판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제는 말하기조차 식상하지만, 현실적으로 많은 목회자들은 “거룩한 그리스도의 몸”보다는 “성공적인 재단”을 꿈꾸고, 성도들의 거룩함보다는 조직의 확장에 열을 올린다. 말을 그렇게 한다는 것이 아니라, 성경적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그 속에 이처럼 세속적인 내용을 담는다는 것이다. 이런 현실에서 신학이 맹목적으로 목회를 돕는다면, 이는 신학이 비성경적인 목회 행태의 시녀로 전락한다는 말이 된다. 이것은 교회를 돕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파괴하는 일이다. 오늘 한국 교회에 나타나는 많은 파행적 행태들이 이런 세속적 교회관과 목회관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기는 어렵지 않다.
많은 경우 교회가 목회자 중심으로 돌아가지만, 목회자가 교회의 전부는 아니다. 교회의 중심이 될 수도 없다. (적어도 개신교적 관점에서 볼 때) 성경적 교회는 목회자에게서 시작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그림이 말해주듯, 교회란 하나님의 백성,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공동체다. 따라서 교회의 가장 중요한 존재 목적은 하나님의 의도대로 이 성전 공동체가 거룩하게, 혹은 그리스도의 몸이 건강하게 “지어지는/세워지는” 일이다. 물론 교회가 건강하게 세워지는 일에 목회자들 역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하지만 머리와 몸으로 이어지는 교회의 역동적 움직임 속에서, 혹은 실제로 몸을 자라게 하는 하나님의 활동 속에서 “심거나” 혹은 “물을 주는” 목회자들의 역할은 언제나 부차적인 것으로 남는다. 바울의 말처럼, 목회자는 항상 제자들의 공동체를 돕는 “종”의 위치에 머문다(고전 3:22-23; 4:1; 9:19; 고후 4:5!). 우리는 목회자의 권위를 말할 수 있지만, 이 권위는 “성도들의 건강을 돕는 자”라는 신적 소명의 틀 속에서만 유효하다(고후 1:24; 10:8; 13:10). 목회자들의 목회가 성도들의 삶을 돕는 것이 아닐 때, 그 권위는 성도들의 건강을 위협하는 독으로 작용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목회자-평신도”라는 비성경적 신화(神話)가 하루 속히 “하나님의 백성-백성을 섬기는 종/사역자”라는 성경적 패러다임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현재의 상황에서도 많은 목회자들은 신학교육이 실제 목회에 도움이 안 된다고 불평한다. 물론 이런 불평은 어느 정도 정당하다. 성경적 소양이라든가, 혹은 이를 선포하는 설교의 기술이라든가, 혹은 성도들을 가르치는 역량 면에서 필요한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측면도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위험한 투정일 수도 있다.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성경적” 진리가 자신이 욕심내는 목회적 성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불평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부교역자는 하나님이 아니라 담임목사를 섬겨야 한다”는 이야기까지 할 수 있는 수준이라면, 목회자의 현실적 요구가 신학교육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물론 이는 목회자들의 문제만은 아니다. 대부분의 신자들 역시 그런 구조의 교회관에 길들여져 있고, 그런 관점에서 신앙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신앙생활은 좁은 의미에서의 “교회생활”로 축소되고, 하나님 섬김 역시 “교회봉사”와 동일시된다. “거룩한 주일”이 신앙의 중심으로 간주되고, 일상의 삶은 그 중심을 위한 변두리 혹은 배경으로 상대화된다. 이런 이원론적 상황에서, 삶에서 생겨나는 많은 어려움들과 물음들은 교회서 거론해서는 안 되는 일 아니면 거론해도 시원한 답변이 주어지지 않는 사안으로 남는다. 또한 많은 경우 교회봉사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우리의 종교적 몸짓은 일상의 세속성을 가리려는 위선으로 쉽게 변질된다. 정확하게 십일조하고 나머지는 내 욕심대로 쓴다거나, 주일 봉사 열심히 하고 나머지는 현실의 흐름을 따라 사는 것처럼, 비신앙적 일상생활을 합리화하는 종교적 수단으로 전락한다는 것이다. 이런 구도에서 세상을 이기는 건강한 그리스도인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물론 목회자들이나 성도들이 그런 모습을 깨닫고 스스로 성경적 교회관과 목회관으로 돌아가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면 좋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기대는 비현실적이다. 어떤 형태로든 외부적 자극이 필요할 것이라는 이야기다. 이것이 일상생활신학의 역할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일상이라는 삶의 공간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야 하는 성도들의 관심사와 물음들을 선명하게 추스르고 이를 목회와 목회자 양성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귀에 들리게 하는 것이다. 목회자들이 설정한 현실적 요구를 섬기는 차원을 넘어, 목회 자체가 성도들의 영적 투쟁을 돕는 쪽으로 방향을 설정하고, 그런 목회를 준비하는 신학교육이 되도록 해 달라는 요구를 분명히 하는 것이다.
신학교육의 대상과 목적에 관한 물음
또한 우리는 신학교육의 대상에 관한 물음도 제기해 볼 수 있다. 현재 신학교육은 목회자 그룹에 국한된다. 목회자가 되려는 사람들 혹은 목회자로서 후속교육을 받고 싶은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신학교육이 반드시 목회자 양성의 기능에만 머물러야 할까? 신학교육의 형태를 다양화하여, 성도들 또한 자유롭게 신학교육의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할 수는 없을까? 목회자가 신학자가 되려는 의도는 없지만, 이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일의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 고민하는 성도들이 많다. 물론 속한 교회에서 나름의 교육을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의식 있는 성도들이 자신의 일상적 삶의 문맥에서 갖는 고민이나 질문들은 소위 “성공적 목회”에는 도움이 안 되는 수가 많고, 따라서 지역교회에서 이에 대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의도적으로 성도들의 관심사와 문제제기를 막으려는 목회자들도 적지 않다. 이것은 결코 바람직한 상황이 아니다.
필자는 신학교라는 울타리 안에서든 밖에서든 일상생활을 살아가는 성도들의 건강한 혹은 불가피한 관심사와 질문을 다룰 수 있는 교육의 기회가 성도들에게로 확대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굳이 말하자면, 목회자를 가르치고, 이들 목회자가 성도들을 가르치는 기존의 방식에 더하여, 성도들과 보다 직접적으로 소통하는 신학교육의 형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지역 교회 내에도 설교를 비롯하여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이 이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대부분 지역교회와 담임목회자의 방침과 실용적 필요의 울타리를 넘지 않는다. 오히려 “목회자-평신도”의 도식 아래 항구적 “목회자 의존형 성도”를 길러내는 경우가 많아 실제 성도들의 신앙적 성장을 돕거나 방해하는 한계가 있다. 또한 많이 “똑똑해진” 성도들의 다양한 물음을 제대로 답해 줄 수 없는 목회적 리더십의 한계도 자주 나타난다. 필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생각한다면, 어쩌면 이것이 현재 우리 교회가 드러내고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의 하나다. 그렇다고 일부 몰지각한 목회자들의 행태처럼, 성도들의 성숙을 막고 목회자 자신의 수준에 맞추도록 강요할 수는 없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의 건강을 위한 최선의 방책은 어떤 형태로든 성도들이 자신의 물음과 고민을 신학적, 성경적으로 모색해 갈 수 있도록 돕는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다. 방식은 다양하게 드러날 것이다. 신학교에서도 학기나 학점에 대한 과도한 부담 없이 비교적 자유로이 참여할 수 있는 방식의 프로그램을 구상하여 제공할 수도 있고, 혹은 이를 지역교회의 장으로 확대하여 교회에서도 성도들이 보다 수준 높은 형태로 신앙적 물음을 생각할 수 있도록 도우면 좋을 것이다. 물론 신학교와 교회와 다른 방식의 교육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최근 젊은 신앙인을 대상으로 다양한 형태의 아카데미 프로그램들이 운영되고 있는데, 이 역시 일상생활신학의 관점에서 매우 고무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가는 말
현재 한국교회의 상황에서 일상생활신학은 하나의 과목이나 영역으로 다루어질 수 있는 주제는 아니다. 신학교육의 바탕이 되는 교회관과 목회관 자체가 비성경적 이원론에 기울어 일상생활의 문맥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형편이기에 기존의 신학교육과 목회적 관행 속에 뿌리박힌 비성경적 관념을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이를 해소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우선일 것이다. 성경적 관점을 회복하자는 말은 좋지만, 비성경적 관행에서 덕을 보는 사람들에게 이는 지금까지 누리던 기득권을 포기하라는 말이 된다. 물론 여기에는 모든 계층이 다 포함된다. 신학교육에 몸담은 사람이건, 일선 목회에 종사하는 사람이건, 교회의 일부로 살아가는 성도들이건, 현재의 이원론적 구조로부터 나름의 방식으로 부당이득을 취해왔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상생활신학의 길은 늘 오르막이다. 느리지만 그 오르막을 꾸준히 올라가는 “내공”이 필요하고,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위해 손을 벌릴 수밖에 없다. 일상생활의 영성을 갖추는 것 역시 우리 노력의 한계를 넘어서는 일일 것이기 때문이다.
권연경
숭실대 기독교학과 교수 / 기독연구원 느헤미야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