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1월 26일에 열린 포럼 “다원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무례한 기독교, 그리고 캠퍼스선교”에서 배덕만 연구위원이 발표한 글입니다. 2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3.

이상에서 근본주의의 막강한 영향력 하에 있는 한국교회와 종교다원주의 간의 갈등을 사례중심으로 간략히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타종교에 대한 배타적, 전투적 태도를 고수하는 한국교회를 향해, 몇 가지 제안을 드리면서, 저의 발제를 마치고자 합니다.

먼저, 한국교회는 한국사회가 다종교사회, 혹은 종교다원주의 사회임을 정직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한국사회는 오랫동안 불교, 유교, 그리고 무속이 절대적 영향 속에 있었습니다. 이런 종교들은 단지 제도적 종교의 차원을 떠나, 한국문화의 기저에, 한국인들의 집단적 무의식 속에 깊이 내재화되었습니다. 이런 문화적 틀 속에 기독교가 한 자리를 차지한 역사는 고작 120년입니다. 이것은 기독교인의 수가 총인구수의 20% 남짓한 통계수치로도 확인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한국은 기독교국가가 아니며, 더욱이 기독교의 문화적 지위는 타종 교들과 비교해서, 양과 질 모든 면에서 비주류입니다. 분명, 지난 100년간 한국교회가 경이적인 성장을 거두었고, 전국 어디에서나 교회가 넘쳐나며, 특히 상류층의 경우 기독교인의 비율이 대단히 높은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이전에 비해, 기독교의 위상과 영향력이 한국사회 전반에서 급증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한국은 기독교 국가가 아닙니다. 막강한 힘과 영향력을 보유한 여러 종교들 중 하나에 불과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가 자신의 배타적 특권을 주장한다던가, 타종교의 존재를 부정한다던가, 심지어 그들 위에 군림하려 할 때, 기독교는 한국사회 통합의 구심점이 아닌, 분열과 갈등의 암적 요소로 전락할 수 밖에 없습니다. 타 종교에 대한 안하무인적 태도는 현실적으로 교회의 선교에도 부정적 영향을 끼치며, 궁극적으로 기독교의 생존자체에 위협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 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겨야 할 때입니다.

둘째, 한국교회는 타 종교와의 대화에 보다 개방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로 참여해야 합니다. 타 종교에 대한 배타적 태도는 기독교 신앙의 고유한 특징이기에 앞서, 타자에 대한 무지와 오해에 기인한 부분이 적지 않음을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성경도 제대로 읽지 않고, 더욱이 신학공부가 거의 전무한 한국교회의 대다수 성원들이 타종교에 대해 학습할 수 있는 기회와 의지는 대단히 희박합니다. 결국, 우리가 그들에 대해 갖고 있는 지식이나 정보는 대단히 피상적이며, 흔히 과도하게 왜곡된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타 종교, 타 종교인들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비난과 정죄는 지적 설득력이나 윤리적 정당성을 획득하기 어렵습니다. 결국, 무지에서 기인한 문제를 해결하거나, 오해에서 비롯된 갈등을 풀기 위해선, 타 종교인에 대한 보다 개방적이고 진지한 학습이 선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동시에 이런 학습의 가장 훌륭한 방법은 타종교인들과의 대화에 직접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주장을 그들의 글과 강연을 통해 직접 듣고, 묻고, 대화하고, 논쟁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그들의 생각을 보다 생생하고 진솔하게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얻고, 우리의 오해나 무지의 상당부분을 해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셋째, 한국교회는 타종교를 타자로 인식하기 전, 그 구성원들이 우리의 이웃이며 형제자매임을 먼저 기억해야 합니다. 종교적 신념의 차이를 강조하기 전, 모두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신령한 피조물이요,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총을 입은 존귀한 존재이며, 장차 하나님의 나라를 함께 지어갈 거룩한 백성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따라서 그들을 타종교인으로 배제하고, 이방족속으로 정죄하고, 구원받지 못한 죄인으로 비난하는 대신, 여전히 우리가 사랑하고 섬기고 품어야 할 이웃, 형제, 그리고 동료로 이해해야 합니다. 비록 그들이 현재 다른 종교를 신봉하며, 교회에 다니길 거부해도, 그들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흘린 주님의 보혈이 그들과 무관하다고 주장할 수도 없습니다. 현재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은혜가 그들만 피해간다고 믿을 수도 없습니다. 설령, 우리는 그들을 이해할 수 없고, 용납할 수 없고, 도무지 사랑할 수 없을 지라도, 여전히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요, 하나님 나라에 초대된 자들임을 잊어선 안됩니다. 돌아온 동생에 대해 반가움 대신, 질투의 불길에 휩싸인 형의 모습을 기억합시다. 형뿐만 아니라 탕자인 동생도 여전히 아버지의 자식이며, 아버지가 탕자 아들을 사랑하고 기뻐하듯이, 형도 그래야 한다는 것이 성경의 교훈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넷째, 한국교회는 교단신학을 비롯한 특정신학에 대한 무비판적, 배타적 추종에서 벗어나, 보다 객관적이고 진지하게 성경을 연구해야 합니다. 물론, 절대적으로 객관적인 성경읽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기 전, 우리 안에 이미 내재화된 신학적 관점들이 존재하며, 이것들의 영향력은 막강합니다. 개혁주의자들의 성경읽기와 웨슬리안의 성경읽기가 동일할 수 없고, 신학자의 성경읽기와 부흥사의 성경읽기도 동일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성경을 신학의 틀에 한정되지 않고, 최대한 성경이 말하는 바를 겸손하고 정직하게 경청하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이런 과정에서, 예수가 타 종교에 대해 어떤 가르침을 주셨는지, 이 주제에 대한 성경저자들의 입장이 무엇이었는지를 진지하게 관찰해야 합니다. 타 문화권에서 목숨을 걸고, 그러나 이방민족에 대한 다함 없는 사랑으로 복음을 전했던 그들의 사상과 사역 속에서 우리는 오늘의 우리 모습과 전혀 다른 성서적 전거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정말, 한국교회가 성경의 절대영감과 무오를 믿는다면, 그래서 성경의 가르침을 신적 계시로 존중한다면, 우리는 배타와 독선 대신 용서와 관용으로, 폭력과 정복 대신 설득과 섬김으로 척박한 이방 땅에 복음의 씨앗을 심었던 주님과 그의 제자들의 모범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끝으로, 한국교회가 밟아야 할 땅은 불교사찰이 아닌, 자신의 예배당이 먼저 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땅밟기에 몰두하는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여리고성 함락을 성서적 전거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 한국교회가 더욱 주목해야 할 성경의 기록은 여리고성 함락이 아닌, 예수님의 성전청결사건입니다. 현재 한국교회가 사회에서 개혁의 세력 대신 개혁의 대상이 되고 있는 참담한 현실은 이 땅에 타종교가 번성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한국교회의 양적 성장이 멈추고 타종교들이 성장하는 서글픈 현실은 타 종교들이 전투적으로 선교활동을 벌이기 때문도 아닙니다. 이 모든 비극의 원인은 한국교회 자체의 부패와 타락에 있습니다. 정작 하루빨리 무너져야 할 것은 교회 밖에 있는 여리고성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예루살렘 성전입니다. 예수를 십자가의 죽음으로 몰아낸 것은 여리고성의 이방민족이 아니라, 예루살렘의 종교지도자들이었습니다. 이런 현실에서, 스캔들로 얼룩진 예배당 대신 타종교의 법당을 정복과 구원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삼류 코미디에 불과합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불교인들의 눈에서 티끌을 빼내려 하기 전에, 우리 안에 있는 들보를 제거하는 작업부터 해야 합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이슬람의 한국상륙작전에 전율하기보다, 맘모니즘의 강단장악에 경악해야 합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WCC의 종교다원주의를 비난하기에 앞서, 뒤틀린 자신의 영성 앞에서 통곡해야 합니다. 지금은 한국교회가 타종교 정복에 나설 때가 아닙니다. 지금은 재를 뿌리고 회개할 때입니다.

배덕만

기독연구원 느헤미야 전임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