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이 성경 되게 하라
20세기 복음주의의 최대 이슈는 성경의 권위 문제였습니다. 자유주의자들이 발전시킨 성서 비평학,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에 기초한 진화론의 공격에 대항하여, 프린스턴신학교의 성서 무오설, 넬슨 달비의 세대주의, 그리고 20세기 중반에 출현한 창조 과학 등에 의해 성경 전쟁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런 논쟁은 결국 미국 교단의 대분열을 초래했습니다. 이후, 성경에 대한 이해는 진보와 보수를 구분하는 신학적 척도가 되었고, 이 문제를 둘러싼 교회의 갈등은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습니다.
미국 교회의 절대적 영향 속에 형성·발전되어 온 한국교회의 상황도 미국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신학적 보수주의가 절대 우위를 점하고 있는 한국교회에서 성경의 권위는 신앙의 본질을 규명하는 절대적 잣대입니다. 비록 학계에서는 성서 비평학이 활발히 논의되고 있지만, 교회에선 성서 무오설이 절대 우위의 지위를 확보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대한 비판적 성찰 자체가 불신앙의 결정적 표현이며, 성경의 권위를 수호하는 것이야말로 신앙의 진수로 칭송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의 진정한 권위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성경이 하나님의 절대 영감에 의해 기록되었고, 단지 구원의 문제뿐만 아니라, 과학과 윤리의 영역에서도 ‘무오하다’고 믿는 것, 그리고 그 믿음에 기초해서 이에 반하는 일체의 주장을 향해 투쟁의 칼을 높이 드는 것이 과연 성경을 존중하는 유일한 태도일까요? 물론 저는 성경의 권위를 존중하는 일체의 태도를 귀하게 여깁니다. 하지만 성경에 대한 철저한 믿음이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더욱 철저한 실천으로 구현되지 않는다면, 그 태도의 진정성에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경의 권위를 수호하기 위해 목숨을 건 싸움조차 마다하지 않으면서, 정작 성경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일에 몸을 사린다면, 우리는 이런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천지가 6일 만에 하나님 말씀으로 창조되었다고 당당히 주장하는 신자들이 정작 “형제를 위해 목숨을 버리라”, “너의 재물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라”,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라”, “돈은 일만 악의 뿌리다”라는 말씀에 귀를 닫는다면, 우리는 성경에 대한 그들의 태도를 어떻게 해석해야 될까요?
20세기 복음주의가 성경의 권위를 수호하기 위해 자유주의와 치열한 ‘신학 논쟁’에 몰두했다면, 21세기 복음주의는 성경의 권위를 입증하기 위해 ‘삶의 투쟁’을 치열하게 전개해야 할 것입니다. 성경에 대한 진정한 믿음은 성서 무오설에 대한 신학적 주장이 아닌, 삶을 통해 성경의 진리를 증명함으로써 보다 강력히 입증될 것입니다. “하나님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전 4:20)는 바울의 말씀을 존중한다면, 성경의 권위도 말이 아닌 삶으로 지켜야 할 것입니다.
믿음이 믿음 되게 하라
교회사에서 루터가 기여한 최대의 공헌은 구원의 여정에서 믿음의 자리를 회복한 것이었습니다. 반면 중세의 로마 가톨릭교회가 범한 최대의 오류는 믿음의 가치를 오해함으로써, 순진한 신자들을 미신의 수렁에 침몰시킨 것입니다. 결국 믿음에 대한 오해가 가톨릭교회의 타락과 실패의 원인이 되었고, 믿음에 대한 바른 이해가 종교 개혁의 출발점이 된 것입니다. 오늘의 교회는, 특히 복음주의 교회는 이런 루터의 전통을 충실히 계승함으로써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한국교회는 믿음을 복음의 핵심으로 이해하고, 이 전통을 유지·발전시키는 데 최선을 다했습니다. 믿음은 모든 것의 근원이었습니다. 믿음으로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믿음으로 헌금하고, 믿음으로 교회를 건축했습니다. 믿음으로 병을 고쳤으며,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믿음으로 헌신했고, 믿음으로 충성했습니다. 그 믿음이 한국교회 부흥의 밑거름이었고, 경이적 성장의 원동력이었습니다.
하지만 최근에 한국교회의 위기론이 팽배해지면서, 우리가 그토록 강조하고 자랑했던 ‘믿음의 실체’에 대해 진지한 반성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받았다고 ‘믿었던’ 은혜가, 우리가 ‘믿음으로’ 드렸던 헌금과 ‘믿음으로’ 건축했던 성전이, 우리가 ‘믿음으로’ 행했던 충성과 헌신이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교회의 명예를 실추시켰기 때문입니다. 21세기라고, 포스트모던 사회라고, 믿음의 가치가 폄하될 순 없습니다.
믿음이 죽은 교회는 상상할 수 없고, 믿음이 배제된 기독교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제는 우리가 정직하게 물어야 합니다. 무엇이 진정한 믿음인지, 성경이 말하는 참된 믿음은 무엇인지, 목회자들이 가르치고 선포했던 믿음이 정녕 성경이 가르치고 선포한 그 믿음이었는지, 그리고 신자들이 소박하게 이해하고 실천했던 믿음이 정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그 믿음인지 말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믿음으로 은혜를 누려야 합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받기 원하는 은혜의 실체가 무엇인지에 대해선 고민해야 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믿음으로 헌금하고 교회를 건축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믿음으로 드리는 헌금이 어디에 쓰이며, 그 믿음으로 짓고자 하는 교회의 모습이 무엇인지 깊이 성찰해야 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믿음으로 병을 고치고, 기적을 일으켜야 합니다. 하지만 그 믿음으로 고치려는 질병이 무엇이며, 그 믿음으로 꿈꾸는 기적의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해 정말 정신 바짝 차리고 생각해 봐야 합니다. 잊지 맙시다. 믿음이라고 다 믿음이 아니며, 교회에서 믿음으로 행한 일이 언제나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것은 아니란 사실을 말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 되게 하라
이 땅에서 기독교가 행한 가장 훌륭한 일은 이방과 우상의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진면목을 용감하고 정직하게 전한 것입니다. 고대의 기독교인들은 자연을 성스런 존재로 섬기고 황제를 신으로 숭배하던 세상에서, 성부 하나님만을 참신으로 고백했습니다. 중세의 기독교인들은 교황이 그리스도의 자리를 탐하고 교황청이 천국의 영광을 찬탈하던 세상에서, 성자 하나님을 올바로 섬기기 위해 몸부림쳤습니다. 근대의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자리를 인간이 대체하고, 복음을 이념으로 탈색하려는 세상에서, 성령 하나님을 온전히 따르기 위해 분투했습니다.
지난 100년간 한국교회가 보여 준 하나님에 대한 돈독한 신앙도 경이로웠습니다. 이 땅에 성경을 전하기 위해 만주에서 거룩한 땀을 흘린 성경 번역자들은 숭고했습니다. 세례를 받기 위해 몸에 나무 십자가를 매고 경성까지 그 먼 길을 걸어왔던 소래교회 성도들은 아름다웠습니다. 한국교회의 부흥을 위해 통곡의 기도와 눈물의 참회를 드렸던 장대현교회 성도들은 거룩했습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만세를 부르고 순교의 길도 마다하지 않았던 1919년의 성도들은 훌륭했습니다.
하지만 전국 곳곳에 거대한 성전들이 우후죽순처럼 건축되고, 밤하늘의 별처럼, 붉은 십자가가 전국의 밤하늘을 뒤덮고 있지만, 정작 하나님의 영광은 빛이 바래고, 교회의 명예는 땅바닥에 떨어졌습니다. 총인구의 1/4이 교회에 다니며, 정치인들이 교회의 눈치를 살피는 시대에, 교인의 수는 빠르게 줄어들고, 교회의 사회적 영향력은 급격히 추락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신학교는 학생들로 넘쳐 나고, 교회의 자금력은 상상을 불허하지만, 목회자들의 추문은 끊이지 않고, 교회의 법정 싸움은 식을 줄 모릅니다. 교회의 덩치가 가장 커진 지금 하나님의 모습은 가장 초라해 보입니다. 지독한 역설입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의 수가 많은 것이 무슨 죄가 되겠습니까? 하나님에게 헌신한 사람들의 수가 줄지 않는 것이 어찌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겠습니까? 교회가 건축되고, 교회의 재정이 풍부해지는 것이 왜 욕먹을 짓이겠습니까? 다만 문제는 “먹든지 마시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는 성경의 말씀을 우리가 잊은 듯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다니는 이유가 하나님 대신 교회의 목사, 시설, 프로그램 때문이라면? 신학교가 하나님의 나라 대신, 교단의 확장을 지상 과제로 삼는다면? 건축된 대형 교회의 주인이 하나님이 아닌, 담임 목사라면? 깨어진 옥합이 주님의 발 대신 교회의 대지에 뿌려진다면?
21세기 한국교회가 드려야 할 가장 절박한 기도는 아마도 ‘하나님이 하나님 되소서’가 아닐까요? 드려야 할 가장 절실한 예배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예배하는 것이 아닐까요? 드려야 할 가장 귀한 찬송은 ‘하나님께만’ 드려야 하지 않을까요? 건축해야 할 가장 아름다운 성전은 정녕 ‘하나님의 집’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드려야 할 가장 값진 예물은 오직’하나님만 영화롭게 하는 데’ 사용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드려야 할 가장 경건한 신앙고백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가 아닐까요?
배덕만
기독연구원 느헤미야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