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개신교에서 일반적으로 알려진 기도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다.”라는 사상과 함께 이해된 것이다. 왜냐하면 기도는 한국에 개신교가 들어오기 전에 존재했고,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개신교 이전에 존재했던 그리고 오늘날에도 존재하는 기도의 다양한 모습과 행태는 마음의 소원을 이루기 위한 백일기도, 아침과 저녁으로 성황당 또는 큰 바위 아래에서 절하며 기도하는 조석(朝夕) 천배, 맑은 물을 떠서 앞에 놓고 가족의 안녕을 기원하는 기도, 등에서 찾아 볼 수 있는 것으로 한국 사람들에게 이미 익숙한 것들이다.

기도의 오해와 진실의 한 가지 실례는 누가복음 18장 1-18절의 이해와 함께 생각해 볼 수 있다. 본문은 기도와 관련하여 많은 오해를 가져왔다. 이 말씀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늘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으로 “과부와 불의한 재판장(the unjust judge)의 비유”를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이 비유에서 예수는 하나님을 불의한 재판관에 같다고 비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비유에서 7절의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가 이 비유를 통하여 교훈하려는 초점이다. 이 말씀은 불의한 사람들이 비록 악한 동기일지라도 때때로 선한 일을 하기도 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만일 불의한 사람들이 선한 일을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더 선한 일을 하시지 않겠느냐는 의미이다.

1절에서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는 우리의 삶이 기도 그 자체이어야 함을 의미한다. 우리의 삶이 기도가 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이것은 무슨 의미인가? 기도는 말 보다는 생각이며, 기도는 입술 보다는 마음이다. 기도는 삶 속에서 하나님을 날마다 생각하는 것이다. 기도는 곧 생각이며 하나님을 마음속에 모시고 교제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기도하면서 낙심하지 말 것을 비유하여 교훈한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에 반드시 응답하시기 때문이다. 이것은 7절에서 다시 강조되고 있다. 비유의 내용은 어떤 도시에 한 과부가 악한 재판관에게 자신의 사정을 아뢴 것이다. 여기서 과부는 도움을 전혀 받을 수 없는 형편에 처한 사람의 상징이다. 2-3절에 묘사된 불의한 재판관은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무시한다. 말 그대로 악한 사람이다.

과부가 불의한 재판관에게 원하는 것은 3절의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에서 볼 수 있다. 이것은 다시 번역하면 “내 대적자에게서 내 권리를 찾아 주십시오”라는 요청이다. 이 말씀의 의미는 나를 대적하는 자에게서 내 정당한 권리를 찾아 달라는 요구이다. 과부의 요청은 분명하고 간단명료하다. 기도는 구체적으로 말해야만 하나님이 들어 주시거나, 우리가 기도 응답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만일 구체적으로 기도해야 응답받는 것이라면 우리가 지금까지 얻지 못한 것은 더 많았을 것이다. 우리가 구체적으로 적당한 때에 말하지 않았을지라도 하나님께서 필요한 것을 적시에 주시는 분이시다. 하지만 기도 중에 구체적으로 하나님께 말씀 드릴 필요는 있다. 이것은 기도 응답을 확인하기 위함이 아니라, 상담을 위한 것이다. 즉 내 생각을 하나님께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서 상담하고, 잘못된 것이 있다면 바꾸고 고치려는 것이다.

불의한 재판관은 과부의 요청을 한 동안 들어주지 않았다. 그러다가 과부가 계속 찾아와서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요구하기에 그 재판관은 요청을 들어주기로 작정한다(4-5절). 불의한 재판관은 그 과부의 간절한 요청을 들어준다. 비록 그 재판관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지만 결국 과부의 간절한 요청에 따른 정당한 권리를 들어 준 것이다. 과부의 요청을 묘사하면서 3절에 “자주 그에게 가서”, 5절의 “번거롭게 하니”와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고 표현 한 것은 기도의 악착같고, 끈질긴 노력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과부의 요청이 얼마나 절실하고 그가 위기에 처한 연약한 자인가를 묘사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하나님이 이 불의한 재판관처럼 귀찮아서 우리의 조르는 소리를 들어 주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본문에서 가르치는 교훈은 악한 재판관이 과부의 간절한 요청을 들어주었다면, 하물며 하나님께서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백성들의 정당한 요청을 들어주시지 않겠느냐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성품을 언급한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간절하고 합당한 기도를 들으시고 “예”(Yes) 또는 “아니오”(No)로 분명히 응답하신다. 다만 우리가 “아니오”라는 부정적인 하나님의 응답에 올바로 반응하지 않을 뿐이다. 더욱이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부정적인 응답은 기도 응답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끝까지 하나님께 조른다. 내가 원하는 것이 내 방식대로, 내가 원하는 시간에,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 질 때까지 매달린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기도를 믿음의 기도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기도는 본문이 가르치는 기도가 아니다. 예를 들면, 양날 면도칼을 아무리 달라고 조르는 아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아버지는 그 아들을 사랑하기에 절대로 그 양날 면도칼을 주지 않는다. 그 이유는 아들의 요구가 위험하고 아버지는 자기 자식을 지극히 사랑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보다도 우리의 행복을 더 원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밤낮으로 부르짖는 그 백성들의 기도를 들어 주시지 않겠느냐는 반문이다. 밤낮으로 부르짖는 것은 늘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며 사귐을 갖는 것을 의미한다. 즉 날마다 자신을 변화 시켜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기도를 하면 우리가 요청한대로 이루어지게 되어 있다는 잘못된 기대가 우리의 기도를 잘못된 길로 인도한다. 우리가 이기적인 욕심으로 기도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지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파멸로 인도하시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욕심에 따라 정해 놓은 기준대로 응답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만일 그렇게 구체적으로 정해 놓고 기도했는데, 이루어졌다면 혹시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두신 것”(롬 1:26)이 아닌지 긴장해야 할 것이다. 4-5절은 불의한 재판관이 혼자 말한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6-7절은 하나님께서 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권리를 찾아 주시지 않겠느냐? 오래 참으시겠느냐? 라고 반문한다. 택하신 자들이 드리는 믿음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어주신다는 것을 암시한다. 믿음의 기도는 8절에 암시되고 있다. 8절은 하나님께서 속히 그 원하는 자들의 권리를 찾아 주실 것을 말씀하신다. 하지만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고 반문하시면서 믿음에 대하여 회의적인 모습을 보여 주신다. 기도에 있어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은 필수 요소이다.

기도는 우리의 계획과 뜻을 관철시키기 위한 도구나 수단이 아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설득시켜 우리가 원하는 일을 하시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설득시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우리가 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기도를 끝마칠 때 ‘아멘’이라고 말하는 것은 입술로 드린 기도에 신실하게 삶으로 응답하겠다는 선언과도 같은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입술로 드린 기도에 스스로의 삶으로 반응하는 것이 하나님의 응답이다. 김영봉 목사는 이런 기도를 자신의 책『사귐의 기도』에서 밝히고 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지 않으면서, 다시 말하면 기도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지 않으면서 기도한다고 말하는 것은 기도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다.

 

 

조석민

기독연구원 느헤미야 연구위원 / 에스라성경대학원대학교 신약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