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의 폭군이요 종교적 혼합주의의 첨병이었던 아합은 자신의 ‘정적’ 엘리야를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라 비난했다(왕상 18:17). 일견 그의 판단은 정확하고, 또 정당하다. 자신이 섬기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여러 해 동안 비도 이슬도 없을 것’이라고 말했던 자, 그래서 삼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을 고통스럽게 했던 이가 바로 엘리야였기 때문이다(17:1). 하지만 그의 말 속에 담긴 타당성은 피상적이다. 실상 그의 그럴듯한 판단은 유사 논리 속에 몸을 감춘 비겁함에 불과하다. 비가 오지 않도록 한 사람은 분명 엘리야였지만, 그로 하여금 그런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든 이는 다름 아닌 아합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엘리야는 바로 이 점을 지적한다.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자는 내가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아버지 집이다. 왜냐하면 당신이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들을 추종했기 때문이다”(18:18). 그렇다고 해서 3년 동안 비를 내리지 않는 극단적인 수를 쓸 필요가 있느냐고 항변할 수 있지만, 이에 대해 엘리야는 그렇게 밖에 할 수 없도록 만든 아합 정권의 현실을 직시하라고 주문했을 것이다. 비만 내리면 행복한 삶이 아니라, 오랜 기근을 감수하고서라도 해결해야 할 상황이라는 것이다.
물론 아합 자신이 이를 모를 리 없다. 그의 말은 논리가 아니다. 그저 자신을 향할 수 있는 민심의 분노를 엘리야에게 향하도록 함으로써 자신의 입지를 수호하려는 정치적 수사였을 뿐이다. 이런 식의 여론 조작은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 원인이 무엇이든 실제로 고통당하는 것은 백성들이고, 극심한 고통 중에 있는 이들에게는 긴 호흡으로 사태를 바라볼 여유가 없다. 당장 분노를 표출할 사냥감이 필요하다. 물론 아합을 향한 분노는 위험하다. 그래서 그들은 대신 엘리야를 마녀로 지목하고 분노의 화살로 그를 처형한다. 열왕기의 저자는 이에 대해 자세한 말이 없지만, 이후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렸다는 이나 “나만 혼자 남았다”는 선지자의 좌절감은 이런 판단이 사실과 그리 다르지 않음을 말해 준다(19:10).
천안함 사건과 관련하여 참여연대가 안전보장이사회에 보낸 편지가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예견된 일이었지만, 이명박 정권의 외교적 노력을 무위로 만들 수 있는 이들의 행동은 국익에 반대되는 ‘이적 행위’로 받아들여지고, 이런 일을 자행한 참여연대는 ‘매국노’ 집단으로 규정되었다. 가스통을 싣고 참여연대로 돌진하려는 사람도 있었던 것을 보면, 이 일에 대한 보수집단의 분노는 극단적인 것으로 보인다. 사실 정부의 태도가 고깝지 않는 많은 사람들조차도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나?’ 하는 느낌을 갖는다.
이런 비난이 정당한가? 일견 그렇다. 정부가 추진하는 중대한 외교적 사안에 딴지를 걸고 나오니 그렇고, 그런 행보가 북한이나 그 동조 세력들의 논리에 부응하는 것처럼 보이는 더욱 그렇다. 보는 입장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대한민국을 괴롭게 하는 자”라는 비난이 나올 만하다. 하지만 여기에도 한 걸음 더 걸어 들어갈 수 있다. 물론 나는 천안함 침물의 실제 원인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있다. 많은 사람들이 느끼는 것처럼, 그리고 몇몇 진보적 언론이 지속적으로 지적하는 것처럼, 천안함 침몰과 관련한 정부의 설명에는 설득력이 부족하다. 너무 많은 것을 감추고, 너무 자주 말을 바꾸고, 너무 많은 사람들의 입을 막는다.
여기에 지방선거와 관련된 정황이 얽히면 이야기는 더욱 흥미로워진다. 한마디로 특정한 의도를 달성하기 위한 권력적 담론의 냄새가 너무 진하다. 반면 그 주장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설명은 논리적이다. 논리 외에는 달리 호소할 데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엘리야의 기근처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서신은 지나치지 않느냐고 항변할 수 있다. 하지만 그 편지의 내용이 별다른 것은 아니다. 이미 국내에서 여러 통로를 통해 충분히 제기되었던, 하지만 정부로서는 들어줄 의사가 없었던 물음들이었다. 사전에 소통이 이루어졌더라면 자연스럽게 해소되었을 것이 더 큰 사건으로 터지게 된 것 뿐이다. 참여연대의 행보와 관련된 작금의 분위기를 보면서, 한 때 국위 선양 운운하며 애국심에 호소했던 황우석의 논리와 과학적 설득력 외에는 달리 기대하는 것이 없었던 젊은 과학자들의 부딪힘을 떠올리는 것이 지나친 상상력의 비약일까? 국가의 이익과 북한의 위협 등을 거론하며 믿음을 강요하지만, 논리적 설득력 없는 맹종을 요구하는 것이 성숙한 시민의 행보일 수는 없지 않은가?
작금의 정치적 현실은 교회 내의 분위기와도 무관치 않다. 정부의 행보에 답답한 시민이 많은 것처럼, 교회 ‘지도자’들의 행보에 답답한 성도들이 많다. 의식 있는 성도들의 가장 큰 고민거리가 그들의 목사님이다. 교회의 건강한 성숙을 방해하는 가장 큰 걸림돌 중 하나가 목회자라고 느끼는 성도들도 많다. 목회자들의 언어 속에서, 그리고 목회자의 권위에 맹종하는 성도들의 관점에서 이런 부류의 성도들은 종종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로 낙인찍힌다. 하지만 누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들인가? 자신의 사적 목적을 위해 교회를 혼란케 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그들이 신뢰하는 성경의 논리에 이끌리어 물음을 제기하는 이들도 많지 않겠는가? 그래서 우리의 책임은 서로 편을 가르고, 거기에 색깔을 입히는 정치적 수사가 아니라, 성경의 논리로 진실을 가리며 참된 샬롬을 확보하려는 소통이어야 한다. 지금처럼 목회자의 인간적 권위가 절대화되고 성경의 목소리에 재갈이 물리는 시대일수록,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자’가 더 많아지기를 기도해야 할 것이다.
권연경
숭실대학교 기독교학 교수 / 기독연구원 느헤미야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