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음과상황 173호 (2005년 12월 1일자) 에 실린 전성민 초빙연구위원의 글입니다.
– [173호 권두인물] “평신도가 신학의 중심이다”: 폴 스티븐스 방한 ‘평신도 신학’과 ‘일터의 신학’ 복원 주장
‘평신도 신학’이란 용어를 대중적으로 확산시킨 장본인 폴 스티븐스 교수가 방한했다. 지난 11월 8일 한국에 도착한 그는 5일간의 일정으로 초청단체인 치과의료선교회에서의 강연을 비롯하여 여러 신학교와 교회 방문으로 꽉 찬 시간을 보냈다. 캐나다 온타리오주 해밀턴에 위치한 맥마스터(McMaster) 대학에서 신학을 전공하고(M.Div.), 미국 풀러신학교에서 목회학 박사(D.Min.)를 취득한 폴 스티븐스 교수는 목사·목수·회사 경영자·결혼 상담가 등 다양한 직업을 경험했다. 그는 밴쿠버의 캐리신학교(Carey Hall)와 리젠트칼리지(Regent College)에서 20년에 걸친 신학 교수 생활을 마치고 지난 8월 31일 은퇴했다. 학교에서 그의 주 관심사는 ‘일터의 신학(Market Place theology)’을 정립하는 일이었다.
‘소명’ 이해가 달라져야 한다
한국교회의 진로에 대해 좋은 통찰을 던진 이번 일정들 가운데 두드러졌던 부분은 신학 교육에 대한 그의 소신이었다. 즉 신학 교육의 문턱이 낮아져서 의사·주부·엔지니어·교사 등 여러 직업을 가진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신학 교육의 장이 열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에게서 평신도 신학의 필요성과 의미를 들어보았다.
그는‘소명’의 의미를 먼저 짚었다.“첫째, 하나님의 소명을 받았다는 것은 우리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과 더불어 우리가 누구에게 속하였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일을 하라고 부름 받기 이전에 어떤 사람이 되라고 부름을 받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부르심은 우리가 무엇을 위해 여기 존재하는지 알려줍니다. 우리 모두가 -소위‘전임 사역자’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부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 안에서 행해지는 소위‘복음의 일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에서 벌어지는 하나님의 창조하시고 유지하시고 구속하시고 완성하시는 일들에 동참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나는 마치 일부의 그리스도인들만 목사나 선교사가 되는 전임 사역의 소명을 받았다는, 그리고 그 나머지의 소위 ‘평신도’들은‘파트 타임’으로 부름을 받았다는(혹은 전혀 소명을 받지 못했다는) 식의 표현에는 분명히 반대하는 입장입니다.”
폴 스티븐스 교수는 이러한 그리스도의 부름에 합당치 못하게 사는 삶의 세 가지 전형적 유형을 언급했다. 목회자와 선교사만이 소명을 받은 것처럼 이해하는‘소명의 성직화’, 부르심에 대한 여러 주제들을 개인적인 것으로 이해하는‘소명의 사유화’, 부르심을 영적으로만 이해하는‘소명의 영적화’(그는 헨리 나우엔을 빌어 영적화된 삶(spiritualized life)과 영적인 삶(spiritual life)을 구별했다)에 대해 주의하도록 요청했다.
그는 진정 부름에 합당하게 사는 삶이란 소명의 성직화 대신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모든 영역의 삶을 사역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소명을 사유화하는 대신 우리는 상호 의존적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목사가 사역을 하면 성도들이 그 사역을 일방적으로 받는 것이 아니고 혹은 교수가 가르치면 학생들이 이를 일방적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사역을 베푸는 것이며 목사와 모든 교회의 성도들이 서로에게 사역을 하는 것을 말한다. 또한 부르심을 영적화시키는 대신 생활 전체를 활기차게 살아야 한다고 했다. 하나님의 소명은 우리를 종교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름에 따라 우리는 더욱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는 이러한 감미로운 소명은‘성직자’들만 누리기에는 너무나 좋은 것이라고 말해 많은 이들의 웃음을 끌어냈다.
폴 스티븐스 교수는 이번 방한 기간 동안 웨스트민스터·횃불 트리니티·서울신학대학교·장신대 등에서‘일터의 영성(Marketplace Spirituality)’에 대해 설교했고, 봉천제일교회·주님의교회 등에서는 기독 학생과 일반 성도들을 만났다. 11월 14일은 온누리교회에서 목회자 대상의 강의를 했고, 11월 12일에는 영동중앙교회에서 이번 방한의 절정이었던‘일과 비즈니스 하나님의 소명 (Business as a Calling)’라는 주제의 세미나를 진행했다.‘신앙과 일의 일캄‘누구의 일이 하나님, 하나님나라,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의미가 있는가?’‘소명으로서의 일’‘일터, 선교 현장인가 선교인가?’등의 주제를 다루었는데, 약 400여 명이 참석하여 ‘평신도 신학’과 ‘일상 생활의 영성’에 대한 한국교회의 갈증과 뜨거운 관심을 보여주었다.(이날 강의와 질문 내용은 치과의료선교회가 동영상 자료로 제작해 보급한다)
‘목사’가 ‘목수’가 된 사연
그가 질의응답 중에 언급한 개인적인 경험담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는 한동안 목수 일을 한 적이 있다. 왜 그 일을 했었는지 이렇게 설명했다.
“첫째 이유는 목사로서 뭔가 놓치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대학을 졸업하고서 신학교에 갔습니다. 그리고 23살에 담임목사가 되었고 29살이 되었을 때 스물 한 개의 교회를 감독하는 위치에 서게 되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 여름에는 아버지의 사업을 도와드렸는데 이 경우 외에는 세속적인 일을 긴 시간을 들여서 해본 경험이 없었습니다.
두 번째는 많은 교회와 선교 단체들이 자비량 리더에 의해 인도될 필요가 있다는 확신 때문입니다. 5만 명의 성도가 있는 교회는 전임 사역자가 100명이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작은 교회들이 많이 있고, 대부분의 교회들은 작은 교회들입니다. 이런 교회들은 전임 목회자를 재정적으로 전부 지원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소위 세속적 영역에 참여하는 목사들은 자신의 목회 사역에 뭔가를 더 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저희 교회에는 소위 안수 받지 않은 의사가 있는데 종종 설교합니다. 그리고 그의 예화들은 모두 그의 삶에서 옵니다. 이것이 제가 자비량 사역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 두 번째 이유였습니다.
그런데 전적으로 재정 지원을 받는 목사들의 모델은 많이 있는데 자비량 목회의 모델이 없습니다. 하지만 초대교회 첫 300년간 교회는 자비량 사역자들에 의해 인도되었습니다. 2세기 알렉산드리아 교회에는 600명의 성도들이 모였는데 이 교회의 목사는 은장색이었습니다. 초대교회 공의회의 토론거리는 목사가 세상에서 돈을 벌 것인가, 아니면 교회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을 것이냐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대부분의 목사들이 세상에서 일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목수가 된 세 번째 이유는 제가 개척한 교회의 상황 때문이었습니다. 그 교회는 밴쿠버의 걸인들을 위한 교회였습니다. 이런 교회 건물에는 결코 들어오지 않을 사람들을 위한 교회를 집에서 작게 시작했고 다른 교회로부터 오는 사람들을 받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대부분의 개척 교회들이 수평 이동으로 자라는데,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해 교회를 자라게 하자는 결정을 했습니다. 이것은 저를 재정적으로 지원해줄 사람이 교회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또한 제가 나가서 저를 위한 재정 지원을 구하는 것이 좋지 않다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바울은 어떤 사람들은 재정 지원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했고, 자신도 스스로 일해서 다른 사람들을 지원했습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여기에 중요한 원리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손으로 일하는 것을 항상 좋아했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그때 저는 너무 긍정적이어서 목수 일을 몇 주 안에 배울 수 있으리라 생각했었습니다만, 결국 목수의 일을 제대로 배우는데 수년이 걸렸습니다. 하지만 제가 경험 중에 가장 가치 있는 일이었습니다.”
폴 스티븐스 교수는 그동안 많은 평신도 신학과 사역·결혼·기독교 영성에 대한 책·소논문·성경 공부 안내 책자 등을 저술했으며, 그 중에 <참으로 해방된 평신도><평신도가 사라진 교회?> <현대인을 위한 생활 영성><21세기를 위한 평신도 신학><평신도를 세우는 목회자>등이 번역 출판 되었다. 최근에는 스스로 가장 긴 기간 동안 저술했다고 하는 <내 이름은 야곱입니다>와 <영혼의 친구 부부>가 출간되었다. 지금은 라는 책을 저술 중에 있다.
전성민
벤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 세계관 및 구약학 교수 / 기독연구원 느헤미야 초빙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