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음과상황 2008년 4월호에 실린 배덕만 연구위원의 글을 3부에 걸쳐 연재합니다.
창조론 vs. 진화론
적절한 수준의 긴장감을 유지하면서도 대체로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던 복음주의와 과학은 19세기 후반에 진화론이 급속히 확산되면서 상호 불신과 대립의 투쟁관계로 변질되기 시작했다. 사실, 1859년에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이 출간된 이후, 즉각적으로 모든 복음주의자들이 진화론에 맹공을 퍼부은 것은 아니었다. 이 문제에 대한 복음주의의 반응은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고 다양했다. 대체로 보수적 평신도들은 생물학적 진화론에 대해 부정적 견해를 보였으나, 보수적 엘리트들 내에서는 기독교와 진화론의 화해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측과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다양한 해법을 적극적으로 제공하던 측으로 양분되었다. 그리고 초반에 진화론을 반대한 사람들 중에는 보수적 기독교인들 못지않게 진보주의자들도 많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복음주의 진영 내에는 진화론에 대해 경계하고 비판하는 목소리들이 대세를 이루기 시작했다.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먼저, 점점 많은 복음주의자들은 생물학적 진화론과 창세기에 대한 문자적 해석을 조화시키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둘째, 진화론을 수용할 경우, 인간 존엄성의 근거를 상실하게 된다고 우려했다. 셋째, 진화론이 목적론을 부정하면서 우연에 의한 우주를 주장하기 때문에, 무신론을 초래할 위험이 있다고 판단했다.
이런 근심과 의혹은 두 가지 흐름에 의해 더욱 극단적으로 가속화되었다. 일차적으로, 미국의 과학계에서 과학과 종교의 분리를 강력히 추구하기 시작했다. 문명의 발전을 위해서는 과학이 종교를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사회학자 오귀스트 콩트의 입장이 미국 과학계에 큰 영향을 끼치면서, 과학의 영역 내에서 기독교 신앙을 축출하는 현상이 뚜렷이 나타났다. 콩트를 신봉했던 미국의 실용주의 철학자 존 듀이는 종교적 편견에 대한 과학의 승리를 주창하면서, 이 시대의 분위기를 대변했다. 더 이상 학계 내에서 신앙에 근거한 발언이 설득력을 얻을 수 없었고, 지성인들이 신앙을 포기하는 것은 하나의 유행처럼 되었다. 역사학자 조지 말스덴의 말처럼, “과학에 대한 자연주의적 정의가 하나의 방법론에서 지배적인 학문적 세계관으로 빠르게 변모되었다.”
이 같은 과학의 급속한 세속화 경향 하에, 전투적 복음주의자들, 즉 근본주의자들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근본주의 탄생에는 몇 가지 신학적 흐름들이 영향을 끼쳤다. 첫째,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의 영향이다. 미래에 대한 비관적 인식 위에 이 묵시적 종말론은 성경에 대한 문자적 해석을 해석학적 원칙으로 삼았다. 둘째, 프린스톤 신학이다. 이 신학을 통해 소위 “성서무오설”(inerrancy)이 정교한 교리로 출현하게 되었다. 셋째,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을 통해, 성경에 대한 과학적 접근 및 상식적 이해의 가능성이 열렸다. 이런 지적 흐름들이 상호융합의 과정을 거쳐 근본주의라는 전투적 복음주의가 탄생한 것이다. 결국, 이런 성경의 절대적 권위, 문자적 해석, 그리고 과학적․상식적 이해를 중심으로 한 근본주의적 성서관은 자연스럽게 창세기에 대한 문자적 해석을 부정함으로써 성서의 절대권위를 위협하는 생물학적 진화론을 단호히 거부하게 만들었다.
결국, 이런 극단적 대결국면은 1925년 테네시주 데이튼에서 벌어진 ‘스코프스 재판’을 통해 절정에 달하였다. 진화론자들과 창조론자들 간의 치열한 결투였던 이 재판에서 창조론자들은 몰락하고, 이후 진화론자들이 미국 공교육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러나 몰락한 창조론자들은 1960년대에 창조과학 운동을 통해 부활하기 시작했고, 1970년 이후 근본주의자들의 정치적 영향력이 급상승하면서 미국의 정계와 교육계의 뜨거운 감자로 떠오르게 되었다.